대장암 ∙ 자유 이야기

[episode 1] 병과 싸우지 않기로 했다

avatar
그림자도빛이된다
조회 48
댓글 0

대장암 진단을 받은 건 서른일곱이었다.

회사에서는 막 팀장 제안을 받았고, 부모님은 손주 이야기를 슬슬 꺼내던 참이었다.

내 삶은 계획표처럼 굴러가고 있었고, 나는 그 계획 안에서 ‘안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몸속에서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계획은 아무 소리 없이 찢어졌다.


수술은 생각보다 빠르게 결정됐고,

절제 부위는 예상보다 길었다.

입원 중엔 병실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던 날들이 많았다.

한참 동안은,

나는 병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 버티자', '극복하자', '회복하자'

매일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몸은 조금씩 나아지는데,

마음은 점점 병들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병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오래 들여다봤다.

수척하고, 낯설고, 눈동자에 힘이 없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병은, 고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날 이후 나는 싸움을 멈췄다.

내 몸 안의 변화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수술로 잘라낸 장,

예전처럼 되지 않는 소화력,

갑자기 덮쳐오는 피로감조차

‘내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병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병은 내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르쳐준 선생이었다.

무작정 달리던 삶의 속도를 늦췄고,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친 계절, 풍경, 가족의 눈빛이

하나둘 선명하게 들어왔다.


암을 낭만화하고 싶지 않다.

이건 여전히 괴롭고, 무섭고, 불편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살아남는 삶’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앞으로 몇 년을 살게 될지, 어떤 재발이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오늘 아침 커피를 음미할 수 있고,

지하철 안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릴 수 있다.

그게 내가 다시 배운 삶이다.

댓글

0

댓글 없음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