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안에서는 막내 며느리지만 맏며느리 역할을 했다.
그런 내가 암 환자가 되고 항암 치료 부작용에 힘들어 하자, 동서들과 시누이 등 시댁 식구들의 염려와 걱정도 커졌다. 하지만 심신이 날카로워진 나는 그걸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 대한 사랑이 컸기에 그분들의 충격도 매우 컸던 것 같다. 걱정하는 인사말과 시선은 부담스럽고, 아픈 내 모습을 보여주기도 싫어서 아주 친한 친구와 가족 외에는 알리지도 않았다. 건강이 안 좋으셨던 친정 엄마에게도 암 치료를 받는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 가끔 전화로 아무 일 없는 듯 안부 인사만 드렸다. 자주 찾아 뵐 수 없는 내 처지, 그리고 엄마의 위로를 받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서럽고 외로웠다. 벌써 10년이나 지났는데도 기억이 또렷하다. 다시 생각하기 싫을 만큼 마음 아팠던 때였다.
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남편은 내 걱정에 전전긍긍 했지만 나를 위해 뭘 해줘야 할지 몰라 걱정만 했다. 나는 막상 뭘 먹지 못하면서도 남편을 위해 식사를 챙겨줘야 했다. 집안 살림도 내 손이 가야 했다. 나의 힘든 상황을 몰라주는 것 같아 남편도 아들도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래도 남편과 아들은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까다롭지 않은 남편 덕에 잘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저녁마다 집에 돌아와 내가 잘 지냈는지 이마에 손을 얹어 주던 아들. 그 체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힘들게 밤을 보내고 아침이 밝아 오면 ‘오늘은 또 어찌 지내나’ 하고 막막했지만 우리 집 부근에 살았던 조카의 딸 재롱을 보며 마음이 풀렸다. 그렇게 잠시나마 웃으며 괴로움을 잊었다.
용감하게도 항암 치료를 앞두고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치료를 며칠 늦춘다고 해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일본 여행을 앞두고 넘어져 손목을 다치는 바람에 깁스를 했다. 아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깁스를 한 채로 일본 여행을 강행했다. 즐거운 여행의 추억을 안고 항암 치료를 하고 싶었다. 주치의는 깁스를 하고 나타난 나를 보고 어이없어 했지만.
병문안 왔던 가족들은 침울할 줄 알았던 내가 밝은 표정을 지으니 안심하는 듯 했다. 다행스럽게 항암 치료 효과가 좋아 왼쪽 가슴을 전부가 아닌 일부만 잘라내도 될 정도로 암세포의 크기가 작아졌다. 물론 암 전이를 막기 위해 1주 뒤 재수술로 림프절을 더 잘라냈지만 항암 치료의 고통에 비하면 수술은 견딜만 했다. 수술 후 항암 치료 4회, 방사선 치료 33회를 더 했다. 출근 도장 찍듯이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믿음 덕분에 그 힘든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 매달리고 투정을 부릴 대상이 있어서 감사했다. ‘하느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지?’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고통을 주시면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저 “하느님 도와주세요. 함께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밖에. 그러나 항암 치료의 고통으로 심신이 너무나 지쳤기 때문에 기도도 쉽지는 않았다. 치료를 받으면서 깨달은 것도 있다. 내가 그 동안 잘못 살지는 않았는지, 항암 치료 때마다 옆으로 지켜준 친구들이 많았다. 주사 약이 들어가는 내내 침대 옆에서 놀이터에서 놀 듯 나를 지켜준 친구들 덕분에 항암 치료를 잘 버틸 수 있었다. 수술 후 간병을 서로 해주겠다고 나선 친구들의 따뜻하고 고마운 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